고교 현장실습생은 일회용 노동자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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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현장실습생은 일회용 노동자가 아닙니다
[라이프인ㆍ생명안전 시민넷 공동기획_안전칼럼] 이수정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노무사)
  • 2018.12.19 20:33
  • by 이수정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노무사)

“제발, 아무 데나 말고, 제대로 배우고 취업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졸업을 앞둔 직업계고 3학년 학생의 호소다. 직업계고 학생은 졸업 전 산업체에 나가 현장실습을 한다. 선택에 따라 할 수 있다지만 취업률을 따지는 학교 분위기에 눌려 억지로 나가는 경우도 많다. 한 해 6만여 명이 3만여 산업체로 나간다. 교육은 없고 노동만 있다 보니 다들 실습이 아니고 ‘취업’이라 한다. 취업을 했으면 졸업 후에도 그 산업체에 머물러야 하는데 그런 일도 드물다. 졸업생이 빠져나간 자리는 다시 3학년이 된 현장실습생이 채운다. 인력난에 허덕이는 영세한 산업체는 저임금 노동자를 일회용품처럼 공급받는 통로쯤으로 생각하고, 학교는 단기간 취업률을 올릴 수단쯤으로만 생각하니 취업유지율엔 관심이 적다.

그간 학생의 호소에 대한 학교와 산업체의 무관심, 무책임 속에 현장실습 중 사고와 사망 사건이 반복되었다. 2017년 1월 고 홍OO 님을 떠나보내고 2년, 다시 11월 고 이민호 님을 떠나보내고 1년이 지난 지금, 조금이라도 달라졌을까?

고 이민호 군 1주년 추모제 2018.11.19 (사진-현장실습 제주공대위)

지난해 3월 초 고 홍OO 님의 사건이 알려지면서 300개 넘는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대책회의를 꾸렸다. 애완동물과를 전공한 고 홍OO 님은 ‘욕받이 부서’라 불리는 통신사 고객센터 해지 방어 부서에서 ‘현장실습’ 중이었다. 실적 압박에 시달리던 고 홍OO 님은 ‘아빠, 나 콜 수 못 채웠어.’라는 문자를 남긴 채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더는 실습하다 죽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대책회의는 ‘산업체 파견형 현장실습 중단’과 ‘대안적인 직업교육 마련’ 등 전면 개편을 요구했다. 전주와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힘을 모았다. 이번에도 우리 사회가 책임을 다하지 않고 그냥 넘어간다면 어떤 희생을 또 치러야 할지 모른다는 절박함이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자 정부는 2017년 8월, 조기 취업형 현장실습 운영을 바로잡겠다고 했다. 관련법에 교육과정임을 명확하게 하고, 학생들이 안전하게 실습할 수 있도록 산업체 지도점검을 강화할 뿐 아니라 ‘안전한 산업체 정보’를 제공하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다시, 고 이민호 님이 음료 공장에서 희생되었다. 발표만 요란했을 뿐 달라진 게 없었기 때문이다. 2003년 ‘고등학교 현장실습 운영 개선 방안’(조기 취업형 현장실습 규제), 2006년 ‘현장실습 정상화 방안’(전공과 취업 무관한 현장실습 규제), 그리고 2013년 ‘학생 안전과 학습 중심의 특성화고 현장실습 내실화 방안’에서도 ‘안전’, ‘학습 중심’, ‘조기 취업형 현장실습 규제’는 매번 반복한 말이다. 그간 실패한 대책을 성찰하지 않고 반복만 하는 것이 어떻게 새로운 대책이 될 수 있나?

2018년 2월, 정부가 ‘학습 중심 현장실습의 안정적 정착방안’에서 내세운 ‘선도 기업’ 인정 실태를 보면 얼마나 안일하고 한가한 대책으로 일관하는지 알 수 있다. 교육부는 ‘학습이 가능하고 안전한 선도 기업’을 선정하고, 선도 기업에서 현장실습을 하면 수업일수의 2/3를 채운 후 조기 취업이 가능하도록 했다. 시기만 살짝 늦췄을 뿐 크게 달라진 게 없다는 건 학교도 금방 알아챘다. 일부 학교가 기업을 발굴하여 여름방학 시작부터 교육청에 ‘선도 기업’ 인정 신청을 하고 학생을 내보냈다. 눈치만 보던 학교들도 10월 들어 선도 기업 인정 신청을 서둘렀다.

정부에서 업체 정보를 주겠다는 계획과 달리 선도 기업 발굴 책임은 여전히 학교에 있다. 인정 절차를 거추장스러워하는 기업에 읍소해야 하는 것도 교사의 몫이다. 교육과정을 정상화하겠다는 발표는 온데간데없고 수업시간을 통째로 기업에 넘기는 ‘교육의 외주화’만 남았다. 그런데 ‘안전은 이렇게’, ‘교육은 저렇게’ 하라고 요구하지 못하는 이상한 외주화다. 오히려 ‘을’의 처지에서 소용도 닿지 않는 학습 프로그램을 마련해 기업에 보내고 있다. 그런데 순서도 틀렸다. ‘안전하고 학습 가능한 선도 기업’으로 인정하기도 전에 학생은 이미 산업체에 나가 있다. “이 기업에서는 그다지 오래 있고 싶지 않다”라는 학생의 의견은 “다 따지면 보낼 데가 없다”라는 교장의 말로 뭉개고 있다. ‘학습’도 ‘안전’도 서류에만 있다.

이렇듯 학습도 안전도 담보되지 않은 이름만 그럴듯한 ‘선도 기업’에서 예년과 다름없는 현장실습이 위태롭게 진행 중이다. 고 이민호 님을 ‘삼킨’ 컨베이어 벨트도 그대로 돌아가고 있다. 국회의원 여럿이 나서고 특별 근로감독까지 하더니 재발 방지 대책은 펜스 하나 덜렁 설치하고 그만이다. 산업안전보건 기준 513개, 근로감독 기준 167개를 위반하고도 공장은 잘도 돌아간다. 무엇을 점검하고 무엇을 바꿨는가?

‘실습하다 죽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호소를 더는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 현장실습 중 사고는 개인의 책임, 개인의 불운이 아니다. 부정의한 구조에 의한 희생이다. 교육 당국과 기업에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육 당국은 기업에서 학습이 가능하다는 환상을 버리고 산업체로 학생을 보내는 일부터 멈춰라. 직업계고 교육과정을 정상화하고 대안적인 직업교육을 마련하라. 위험을 외주화하지 않는 안전한 일터, 고졸자가 차별받지 않는 평등한 일터를 위해 관련 대책도 함께 점검하라. 연결된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고 실마리를 찾아야 할 때다. 더는 기회를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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