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만에 산재 인정받은 삼성 직업병 피해자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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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만에 산재 인정받은 삼성 직업병 피해자의 눈물
삼성전자 피해자 한혜경 14년만에 산재 인정...질판위 "업무상 질병, 상당인과관계 인정" 발표
  • 2019.06.05 15:00
  • by 김지현 기자

14년 만이다. 누가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줄 예상했을까. 삼성전자 LCD공장에서 일했던 한혜경씨가 뇌종양으로 쓰러지고 업무상 재해(산재)로 인정받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다.

긴 세월 끊임없이 투쟁하고 분노하고 포기하지 않았던 한 씨는 마침내 귀한 승리를 품에 안았다. 뇌종양 진단(2005년)을 받은 지 14년, 첫 산재신청(2009년)을 한 지 10년 만이다.

5월 23일 근로복지공단 '업무상 질병판정위원회'(질판위) 다수는 "신청인의 상병과 업무와의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며 "사실관계 및 전문가 의견을 종합하여 신청인의 죄송양은 산업재해보상법상 업무상 질병"이라고 한혜경씨의 산재신청을 받아들였다.

한 씨는 지난 2009년 3월 근로복지공단 평택지사에 산재신청을 했지만 승인을 받지 못했다. 근로복지공단에 심사청구를 거쳐 재심사청구까지 했지만 모두 기각됐다. 이에 소송을 제기(2013년)했지만 3년을 끌고 결국1심부터  2015년 3심심까지 모두 패소했다. 2심은 공판조차 열리지 않았다.

근로복지공단 재신청 절차가 남아 있었지만 '신청 하나마나 아니냐'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삼권분립의 원칙상 행정부는 법원이 패소 판결을 내리더라도 그와 다르게 판단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한 씨는 "나는 산재가 맞다. 그러므로 산재 인정을 받아야 한다"며 다시 질판위의 문을 두드렸다.

한 씨는 재신청 이유서에서 "직권취소는 행정청의 스스로의 반성에 의거하여 행정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목적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대법원도 행정처분을 한 처분청은 성립에 하자가 있는 경우 이를 취소할 별도의 법적 근거가 없다고 하더라고 직권으로 이를 취소 할 수 있다고 판결한 바 있다 (2001두9653 판결)"고 주장하며 다시 산재신청을 했다.

반드시 산재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혜경씨의 염원이 하늘에 닿았을까. 신청은 기각되지 않고 1차로 질판위가 열렸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인고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첨단산업분야 직업병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업무와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에 관한 판례의 입장이 완화되고 뇌종양으로 산재를 인정받은 사람들도 여럿 나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정은 끝까지 순탄치 않았다. 논의가 거듭됐고 구성원 6명의 의견이 3:3으로 갈리면서 결론이 나지 않아 2차까지 질판위가 열렸다. 

2차 질판위가 열리고 한혜경씨 어머니 김시녀씨는 "이번이 제도적으로 다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말하자 한 씨는 "무섭다"며 "마지막이라는 말(을) 하지 말라"고 했다. 반드시 인정받아야 한다는 절실함이 묻어났다. 그리고 그 절실함이 통했던 것일까. 

마침내 산재 인정 판정서를 받아든 한혜경씨는 눈물을 쏟으며 "너무 기뻤다. 하지만 처음부터 당연히 인정받았어야 했다. 이렇게 긴 세월이 걸렸다는 것이 너무하다"면서 "앞으로 직장에서 다치거나 병이 들면 신속하게 처리되어 나 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소감을 전했다.

14년간 성치 않은 몸으로 시위를 하고, 소송을 하며 어떻게 그 세월을 견뎌냈을까. 억울함과 분노도 추진력이 되어 주었겠지만 그녀의 옆에 그녀의 외로운 투쟁을 긴 세월 함께 한 어머니 김시녀씨, 한씨 모녀의 생계와 투쟁을 지원한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산재를 인정받기 위해 싸운 수많은 노동자들도 모두 보이지 않는 힘이 됐을 터다.

10년을 꽉 채우고도 조금 넘기는 그 긴 투쟁 기간 항상 그녀의 곁에서 함께 했던 어머니 김시녀씨. 그리고 시위와 소송을 함께한 단체 반올림과 반올림의 이종란 노무사는 이번 결과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눈물을 쏟았다.

반올림의 이종란 노무사는 이번 결정에 대해 "노동자의 승리"라고 의미를 부여하며 "지난 11년간 반올림이 진행한 집단산재소송만 137건이다. 국가는 계속 산재가 아니라며 노동자들을 외면하고 내쳤지만 노동자들이 줄기차게 요구하면서 산재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모두 산재로 고통받는 노동자들이 만든 결과라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 노무사는 "무덤이 산처럼 쌓여야 하나의 직업병이 인정된다"며 "산재 인정에 사전 예방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산재 인정에 까다로운 노동부의 태도 변화를 촉구했다.

다음은 한혜경씨 어머니 김시녀씨의 소감과, 반올림측 입장 발표 전문이다.

반올림과 함께한 한혜경씨의 시위 현장.

-  다   음  -

<반올림 입장문>

'이제는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라는 의미가 담긴 한혜경님의 산재인정 판정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한혜경님은 어머니 김시녀님과 함께 그 누구보다도 오랜 기간 동안, 열정적으로 전자산업 직업병 문제를 제기해 오신 분입니다. 한혜경님의 첫 산재신청은 2009년 3월에 있었고 지금은 2019년 5월이니, 싸워온 기간만 10년이 넘습니다. 뇌종양 진단을 받은 2005년 10월부터 본다면 14년만의 일입니다. 그 긴 시간동안 한혜경님은 육체적, 경제적, 정신적 고통뿐 아니라 거듭된 산재 불승인, 삼성의 책임회피 등 많은 어려움에 부딪히면서도 전자산업 직업병 문제를 한결같이 제기해 오셨습니다. 그 결과 2019년 5월 30일 마침내 본인의 뇌종양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직업병(산업재해)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한혜경님은 삼성전자 LCD사업부(현 삼성디스플레이주식회사) 모듈과에서 생산직 오퍼레이터로 근무한 5년 9개월(1995. 11.~ 2001. 7.)동안 PCB기판에 전자 부품을 납땜하는 SMT 공정에서 납과 플럭스, 유기용제 등에 노출되었습니다. 재직 중에도 생리가 중단되는 등 점차 몸이 안 좋아지는 것을 느껴 퇴사하였는데, 계속 몸이 안 좋아져 퇴사 4년 뒤에 뇌종양 진단을 받았습니다. 소뇌부에 발생한 뇌종양을 수술로 제거하긴 했지만 그 후유증으로 시각, 보행, 언어장애 1급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후 한혜경님은 2008년 가을 즈음 반올림에 최초로 뇌종양 피해를 제보해왔고 준비를 거쳐 2009년 3월 처음으로 뇌종양에 대해 산재신청을 제기하였습니다.

■ 최초신청 판정의 문제점

한혜경님은 2009년 최초신청 불승인 이후 공단 심사, 노동부 재심사, 법원에서의 1~3심, 그리
고 이후 다시 공단에 재신청에 따른 첫 번째 심의과정(가부동수 보류결정)까지 모두 7번의 산재 판정 자리에서 인정되지 못하다가 2019년 4월 29일 서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의 재심의를 통해 인정되었습니다. 8번째 만에 인정받은 것입니다.

6번의 불승인 판정은 뇌종양의 발병원인에 대한 '의학적 연구'가 부족하다는 점을 문제 삼았습니다. 그러나 연구가 부족한 것은 피해자의 탓이 아니라 현재 의학적 지식수준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2017년 대법원은 의학적 연구부족을 이유로 직업병이 아니라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6번의 불승인 판정은 유해물질들의 위험성이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을 불승인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전자산업의 다양한 유해요인 중 비교적 그 위험성이 잘 알려진 납만 검토되었고, 플럭스나 유기용제, 전자기장, 교대근무 등 유해요인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고려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10여년간 전자산업 노동자들의 직업병 피해문제가 계속 드러나면서 과거 간과되었던 유해물질의 위험성이 조금씩 드러났습니다. 이제는 안전보건공단이 홈페이지 자료를 통해 납땜과정에서 플럭스가 주요한 유해요인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한혜경님이 겪었던 최초신청 과정의 문제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당시 우리 사회는 아직 한혜경님의 말을, 전자산업 직업병 피해자들의 말을 들을 준비가 안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 이번 산재 인정의 의미

전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말을 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한혜경님은 좌절하지 않고 꾸준히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려오셨습니다. 한혜경님이 이전에는 없던 길을 만들어오셨기에, 그 길을 따라 다른 뇌종양 피해자분들도 자신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둘씩 뇌종양 산재 인정사례도 만들어졌습니다.

한혜경님 인정 이전에 7명의 뇌종양 피해자분들이 산재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한혜경님의 이야기도 받아들여질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최초 신청 시 대법원까지 가서 졌지만 재신청을 통해 바로잡을 수 있을지 확인하였습니다. 다행히도 민주노총법률원에서 법률검토 결과 재신청이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대법원 판결도 행정기관이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옳게 고치는 것까지 막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법률검토를 거쳐서 한혜경님은 2018년 10월 16일에 산재를 재신청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2019년 4월 29일 서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심의회의에서 한혜경님도 산재로 인정 받았습니다. 서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판정서를 통해 「▲ 신청인(한혜경)은 약 6년간 삼성디스플레이(주)에서 LCD 모듈과 생산직 오퍼레이터로 근무하면서 작업공정 중에 납, 주석, 플럭스, 이소프로필알콜 등 유해요인에 노출되었고, ▲ 2002년도 이전의 사업장에 대한 조사가 충분치 않았던 점, ▲ 신청인이 업무를 시작한 시기가 만17세로 비교적 어린 나이에 유해요인에 노출되었다는 점, ▲ 신청인이 업무를 수행한 1990년대의 사업장 안전관리 기준 및 안전에 대한 인식이 현재보다 낙후되어 보호장구 미착용 및 안전조치가 미흡했을 것으로 판단되는 점, ▲ 최근의 뇌종양 판례 및 판정위원회에서 승인된 유사 질병 사례를 고려할 때 업무관련성을 배제할 수 없어 신청 상병과 업무와의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는 것이 심의회의에 참석한 위원들의 다수 의견이므로 신청인이 요양급여 신청한 상병 '뇌종양(상의세포종)'은 산업재해보 상보험법 제37조 제1항 제2호에 따른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된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번 산재 인정은 큰 의미가 있는 결정입니다. 근로복지공단이 비록 최초신청 당시 소송에서 이겼으나, 당시 불인정 결정의 부당함을 스스로 인정하고 자신의 입장을 바꾼 것이기 때문입니다. 질병판정위원회가 과거의 잘못된 판단을 시인하고 이제는 다른 모습을 보이겠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올림은 이번 한혜경님의 산재 인정이, '이제는 들을 준비가 되었다'라는 의미로 남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우리 사회가 한혜경님의 이야기를, 전자산업 직업병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다고 말입니다. 하나 더 하자면 '너무 늦어서 미안하다'라는 의미로도 남기를 바랍니다. 전자산업 직업병 문제를 직시하는데 10년이나 걸려서 미안하다고 말입니다. 산재보험의 취지가 사회적 부조인 만큼 앞으로는 그리 어렵게, 그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 남은 과제

한혜경님이 10년 동안 꾸준하게 제기해온 지점들이 있습니다. 본인처럼 더 이상은 일하다 병에 걸리고 아픈 사람이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사업장의 위험에 대해서는 기업이 숨기지 못하게 만들어야 하고 노동자들은 그 위험성에 대해서 충분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 등등. 지난 10년 동안 많은 변화를 만들어냈지만 아직 노동자의 알 권리와 건강하게 일할 권리를 위해서는 가야 할 길들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반올림은 한혜경님이 제기한 문제들이 해결되는 그 날까지 계속 나아가겠습니다.

 

한혜경씨 어머니 김시녀씨.

<한혜경씨 어머니 김시녀씨의 입장 전문>

우리 혜경이 산재인정까지 너무 긴 세월이 걸렸습니다. 의사선생님으로부터 혜경이가 뇌종양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게 2005년이네요. 그 동안의 시간을 생각하면 너무나 유감스럽습니다.

재신청을 진행할 때만 하더라도 이게 과연 될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늦게나마 혜경이의 산재가 인정되어서 너무 기쁩니다. 근로복지공단은 앞으로는 우리처럼 오랫동안 부당함을 겪지 않도록 판정을 올바르게 내려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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