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현장] 일을 '다시시작'하며 꾸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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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현장] 일을 '다시시작'하며 꾸는 꿈
'사회적협동조합 다시시작' 현장 방문 및 안연원 이사장 인터뷰
  • 2020.01.08 07:00
  • by 노윤정 기자
▲ 왼쪽부터 사회적협동조합 다시시작 하정옥 이사, 안연원 이사장, 최경선 감사. 세 사람과 함께 사진에 없는 이순우 이사, 전혜경 이사가 다시시작을 발기했다. ⓒ라이프인

한적한 평일 낮 시간의 경의중앙선 백마역. 역사 밖으로 나가기 위해 종종걸음을 옮기다 보면 출입구 인근에 아기자기한 분위기로 꾸며진 한 장소가 눈에 들어온다. 장소 이름은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리본(Re:Born) 센터. 안내판에는 암 환자들을 위한 사회복귀지원센터라는 설명이 적혀 있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니 은은한 원목향과 향긋한 비누내음이 가장 먼저 반긴다. 그 다음에는 안쪽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와 웃음소리. '사회적협동조합 다시시작'(이하 다시시작)의 첫인상이다.

다시시작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암 생존자들이 모여서 만든 사회적경제기업이다. 고양시와 국립암센터를 비롯한 다양한 기관 및 기업이 유방암 환우회 '민들레회' 회원들의 창업을 지원하여 탄생한 회사로, 현재 리본센터에 입점해 각종 천연비누와 샴푸바를 판매하고 있다. 암 생존자들이 의기투합하여 사업체를 만들었다는 것이 인상적일뿐더러 사회적경제 방식으로 회사를 설립했다는 점 또한 신선하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다시시작과 다시시작이 입점한 리본센터는 어떤 모습일까?

▲ 경의중앙선 백마역 내 리본센터 전경. ⓒ라이프인

"이 공간이 참 다양한 역할을 한다."

안연원 다시시작 이사장은 길을 묻는 어르신을 응대한 뒤 리본센터의 역할이 다양하다며 웃었다. 이어 "여기가 카페처럼 생겨서 그런가, 추울 때는 잠시만 있다가 가도 되겠느냐고 묻는 어르신들도 계신다"고 덧붙였다. 물론 리본센터가 다양한 역할을 한다는 말은 비단 사람들의 쉼터 역할을 한다는 것만 의미하진 않는다. 리본센터에는 다시시작 제품을 전시·판매하는 것은 물론 직원들이 편하게 휴식하고 심지어 취미 활동도 할 수 있도록 공간을 조성해 놓았다. 직원들의 휴식 공간 한 쪽에 장구가 놓여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안 이사장은 민들레회 경기민요동아리 희망소리꾼 팀장이기도 하다).

안 이사장은 다시시작이 이런 공간을 마련하여 활동을 시작까지 많은 지원이 있었다고 밝혔다. 공공보건의료서비스를 사회적경제와 연계하려는 이 실험적인 시도는 고양시와 국립암센터가 먼저 운을 뗐다. 고양시와 국립암센터는 사회적경제 방식으로 암 환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여 암 환자의 자립을 돕고 지역사회 일자리 창출을 도모하고자 했다. 그 사업의 일환으로 다시시작이 탄생했고, 코레일이 역사 안 공간을 저렴하게 임대하고 LG전자가 업무와 휴식에 필요한 각종 전자제품을 후원했다. 안 이사장은 설립 과정에 대해 "민들레회에서 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그때 국립암센터에서 고양시와 함께 암 생존자들의 사업체를 만들려고 한다고 먼저 제안했다. 그렇게 교육과 컨설팅을 받기 시작했고 2019년 9월 보건복지부에서 설립인가를 받기까지 13개월 정도 걸렸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암 생존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국내 제1호 사회적경제기업이 탄생했다.

이처럼 암 생존자들이 사회적경제기업 형태로 창업하여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돕는 교육을 이어가는 것이 리본센터의 또 다른 역할이다. 현재 리본센터 안에서는 소아청소년암 생존자 대상의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안 이사장은 "리본센터 안에 소아청소년암 환자들이 차린 가게도 입점할 계획이다. 소아청소년암을 겪은 아이들이 일자리를 찾을 나이가 됐을 때 건강 때문에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함께 뭉침으로써 그런 약점을 극복하고 하나의 사업체를 만들 수 있다. 그들도 창업하게 되면 이곳에 입점해서 함께할 계획이다. 처음부터 코워킹(Co-working) 시스템을 염두에 두고 시작했다"고 밝혔다.

▲ 리본센터 내부 모습. ⓒ라이프인

결국 그만둬야 했던 직장, 사회적협동조합은 무엇이 다를까?

이렇게 공공기관과 지방자치단체가 나서서 암 환자들의 경제활동을 지원하는 이유가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암은 관련 통계 작성을 시작한 1983년 이래로 국내 사망원인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질환이다. 하지만 의료기술 발달은 암 환자의 생존율을 높여, 2016년 국내 암 환자의 5년 상대생존율(일반인구와 비교하여 암 환자가 5년간 생존할 확률)은 70.6%를 기록했다(국가암등록통계, 보건복지부). 그러나 문제는 치료받은 암 환자들이 다시 경제활동을 하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기능하는 데 많은 제약이 있다는 점이다.

일단 체력 문제가 직장 복귀의 가장 큰 애로사항이다. 국립암센터와 대한암협회가 2019년 4~5월 암 생존자 855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복수응답 가능)에 따르면 암 생존자가 직장에서 겪는 신체적 어려움 1위는 '불규칙한 몸 상태'(69.7%)였다. 심리적 어려움 1위 역시 '건강유지 불안'(80.7%)을 꼽았다. 그러나 체력 외의 또 다른 문제도 있다. 해당 설문조사 참여자들의 26.4%가 직장 동료들에게 암 투병 경험을 공개하지 않겠다고 밝혔는데, 그 이유로 가장 많이 언급한 것이 바로 '편견'(63.7%) 이었다. 사회적으로 암 투병 경험이 있으면 업무 능력이 저하될 것이라는 인식이 퍼져있는 것이다. 암 생존자에 대한 일터 내 차별이 있다고 대답한 비율도 69.5%였으며, 주된 차별은 중요한 업무에 참여하거나 능력을 발휘할 기회의 상실이었다. 이와 같은 이유들로 인하여 암 생존자의 직장 복귀율은 30.5%밖에 되지 않았다(암 생존자의 사회 복귀 지원을 위한 인식조사, 2019).

안 이사장도 비슷한 고충을 겪었다. 안 이사장은 암 치료를 마친 후 다니던 직장에 복귀했다. 10여 년을 다닌 직장이기에 체력 약화를 고려하여 반일 근무를 할 수 있도록 양해해주었다. 그러나 결국 1년 정도 지난 후 종일 근무를 시작하자 체력이 버티지 못하여 일을 그만두게 됐다. 이후에는 직장을 다니려는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다.

"수술하고 항암치료를 받고 나면 체력이 굉장히 저하된다. 병을 겪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힘든 극심한 피로감이 갑자기 찾아온다. 밥 먹다가도 졸릴 정도다. 그런 체력으로 직장에 복귀한다는 게 쉽진 않다. 암 치료 이후에도 일상생활에서 꾸준히 신경 써야 하는 문제들이 있다. 상처 안 나게 조심해야 하고, 모기 물리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의사는 무게가 500g 이상 나가는 물건은 들지 말라고 한다. 림프부종이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어떤 물건을 못 든다고 했을 때 '저런 것도 못 들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개인이 회사에 자신의 상황을 배려해 달라고 말하기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치료 및 검진과 직장 생활을 병행하기 어려워, 끝내 일을 하고 싶어도 직장을 그만두는 상황에 이르는 것이다.

ⓒ라이프인

그렇다면 다시시작에서의 생활은 어떨까? 일단 다시시작은 동일한 경험을 공유한 암 생존자들이 상호 협동하여 설립하고 운영하는 곳이다.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일을 하면서 치료 및 검진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돼 있다. 안 이사장은 지금 하는 일이 영리기업에 다니면서 받던 급여를 생각하면 '못할 일'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구성원이 기껍게 일할 수 있는 이유는 이윤 이상의 가치를 만들고 있다고 자신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취약성을 가진 환자들에게 자립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바로 다시시작이 창출하는 가치다. 우리 사회에서는 암 생존자가 가지는 사회적인 취약성에 대해 간과하는 경향이 크다. 우리 주변에서 암 투병 사례와 암 생존자 수는 점점 증가하는데, 암 생존자들이 사회 일원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인식은 아직 부족한 실정이다. 다시시작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보완한다.

"경제활동을 하고 싶어도 못한 기간을 거의 10년씩 보낸 사람들이 이제 아침에 눈 뜨면 갈 곳이 있고,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 그게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또, 리본센터를 다른 환자들에게 일자리와 더 나은 삶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인데, 우리가 그 안에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 보람 있다. 수익이 많진 않다. 그래도 지금은 수익을 내기보다 어떤 가치를 만들고 있다는 데 뜻을 두고 있다. 우리 힘만으로 만들 수 없는 공간이 여러 단체들의 도움으로 조성되었으니 우리도 힘을 보태려고 한다."

ⓒ라이프인

뜻이 좋은 만큼 지속가능해야

하지만 아무리 수익성을 최고의 가치로 두지 않는다고 해도, 다시시작의 사업이 지속가능한 모델이 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수익 구조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안 이사장 역시 "뜻이 좋은 만큼 지속가능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수익성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따라서 다시시작은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수익 구조 개발과 지정기부금단체 등록을 추진할 계획이다. 또한 안 이사장은 차후 암 생존자를 비롯한 투병 경험자들이 사회적경제기업 형태로 창업할 때 '사업을 지속할 수 있는 아이템 선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섣불리 시작해서는 안 된다. 아이템을 많이 고민해야 한다. 또, 우리는 현재 여러 기관에서 많이 도와주어서 괜찮지만, 젊은 사람들이 우리 방식대로 창업하려면 이 사업 구조 안에서 수익이 많이 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경우에도 일을 한두 해 하고 그만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업을 장기적으로 끌고 가기 위한 자생력을 키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안 이사장의 말처럼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수익 구조를 가진 아이템과 사업 체계를 구축할 때, 사회적경제와 공공보건의료서비스를 연계하려는 시도도 성공할 것이다.

"우리가 좋은 선례가 되어서 국립암센터 안에서 제2·3호 사회적경제기업이 나오고 다른 환우회에서도 우리를 모델 삼아 사회 복귀 기반을 마련한다면 보람 있을 거다. 우리 사업도 잘 돼야 하지만 무엇보다 이런 사례가 많이 생기길 바란다. 그게 가장 큰 바람이다. 다같이 더불어 가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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