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in 한국] 로컬에서 살아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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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in 한국] 로컬에서 살아남기
  • 2024.04.02 10:00
  • by 윤찬영 기찻길 옆 골목책방 대표

'사회 혁신'(Social Innovation)이라는 분야를 공부하다가 저출생과 지역소멸이라는 우리 사회의 난제를 극복하려고 애쓰는 청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런 청년들을 요즘은 '로컬 크리에이터'(Local Creator, 지역 가치 창업가)라고 부르지만 2019년쯤만 해도 마땅히 호명할 말이 없었다.

ⓒStore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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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강화도에서 고군분투하는 청풍협동조합을 비롯해 속초 칠성조선소, 광주 무등산브루어리, 순창 방랑싸롱, 목포 괜찮아마을 등 전국 곳곳의 여러 사례들을 모아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공저)이란 책을 냈다. 이 무렵 정부도 로컬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중소벤처기업부가 처음으로 '로컬 크리에이터' 21개 팀을 뽑아 지원한 시점이 2020년이다. SK E&S는 한 해 먼저 그 유명한 '로컬 라이즈 군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장밋빛 전망이 넘쳐나던 시기였지만 현실은 조금 달랐다.

2018년 기준 기업생멸행정통계에 따르면, 창업 기업은 92만 개로 3년 연속 최대치를 갱신했다. 특히 숙박과 요식업 등에서 크게 증가했다. 하지만 신생기업의 5년 생존율은 29.2%에 그쳤다. 지역마다 차이도 컸는데, 5년 생존율이 가장 높은 곳은 30.9%인 서울이었고, 가장 낮은 곳은 26.5%에 그친 광주였다. 부산(30.9%), 경기(30.0%), 대구(29.6%), 세종(29.5%) 등 네 곳은 전국 평균(29.2%)보다 높았지만, 대전(26.9%), 충북(27.0%), 전남 (27.3%), 인천(27.4%), 경남(27.6%) 등의 광역·대도시조차 광주보다 조금 높은 수준이었다.

또 하나 눈여겨봐야 할 점은 40~50대 숙박·요식업 자영업자가 줄어드는 가운데 20~30대 자영업자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로컬 크리에이터들이 카페나 게스트하우스, 음식점 등에 뛰어드는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20~30대 자영업자 수는 2018년 5월부터 12개월간 전년 동월 대비 4.4%~22.8%p 증가하지만, 숙박·요식업의 5년 생존율은 19.1%로 전체 업종 평균보다 10.1%p 더 낮았다. 그러니까 20~30대 청년이 비수도권, 그것도 작은 도시나 시골에서 음식·숙박업에 뛰어들어 5년 넘게 버티려면 이 낮은 확률들을 모두 이겨내야 한다.

그럼에도 로컬로 향하는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은 중요하다. 정부는 2020년 12월 15일 '제4차 저출산 고령사회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당장 2021년부터 36조 원, 오는 2025년까지 모두 196조 원을 투입하겠다고 했고, '한국판 뉴딜' 예산 160조 원 가운데 75조 원을 로컬에 투자하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효과를 거둘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앞서 정부는 저출생, 고령화 문제에 대응하겠다며 여러 정책들을 발표했지만 빠르게 진행되는 인구 감소를 막아내지는 못했다. 감사원도 정부 정책에 의문을 표했다. 2021년 8월 13일 감사원은 보건복지부,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등을 대상으로 저출생, 고령화 대책과 인구구조변화 대응실태를 감사한 결과를 발표했는데, 기본계획에 따라 2006년부터 2020년까지 14년간 약 380조 원을 투입한 저출생 및 고령화 대책의 효과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감사원은 전체 인구는 줄어드는 가운데 수도권에 청년 등이 몰리는 현상은 오히려 심화되어 소멸 위험에 처한 지방이 앞으로 더 늘어날 것으로 우려했다. 2047년부터 전체 시군구의 69%에 달하는 157개 시군구가 청년 인구 감소로 초고령화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감사원은 "이번 감사 결과 저출산 문제는 청년층의 사회적 이동, 수도권 집중 현상과 관련이 있었다"면서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려면 출산과 양육을 지원하는 기존의 대응 방식을 넘어 지역 간 인구 불균형 문제까지 다뤄야 한다고 지적했다.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려면 지역 간 인구 불균형 문제를 다뤄야 한다는 감사원의 지적은 옳다. 조영태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교수도 『인구 미래 공존』이라는 책에서 저출생 대책을 세우기에 앞서 저출생의 원인을 잘 따져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조 교수는 2017년 올리버 승(Oliver Sng)이라는 학자가 "인구밀도가 높을수록 미래지향적인 성향이 짙으며, 그럴수록 출산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며,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낮은 합계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수도권으로 지나치게 인구가 몰린 탓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수도권으로 몰린 인구를 수도권 밖으로 흩어놓지 않으면 아무리 아이를 많이 낳으라고 당근을 내밀어 봐야 아무 효과도 없을 것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른바 ‘청년몰’의 부침에서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은 전국으로 퍼진 '청년몰'은 2011년 전주 남부시장의 '청년 장사꾼 프로젝트'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회적기업 이음이 수년간 시장에서 다양한 문화 실험을 한 끝에 내놓은 프로젝트였다.

김병수 이음 대표는 청년들의 감각을 전통시장에 접목하고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하여 시장을 탈바꿈하고 새로운 소비층을 만들고자 청년 장사꾼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고 설명한 바 있다.

그러니까 청년몰은 하루아침에 반짝하는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마침 문체부가 그 유명한 '문전성시'(문화를 바탕으로 한 전통시장 활성화 시범사업) 사업을 전국 16곳에서 벌이면서 청년 장사꾼 프로젝트도 2년간 3억 원을 지원받게 되었고, 2011년 청년장사꾼 아카데미를 거쳐 이듬해 5월 마침내 남부시장 2층에 12개의 청년 가게들이 문을 열었다. 그러자 두 달 만에 남부시장 매출이 20%가 늘었고, 3년이 지난 2015년에도 입점을 하려는 청년들이 줄을 설 만큼 남부시장 청년몰은 인기를 끌었다.

남부시장 청년몰이 성공을 거두자 2015년 8월 당시 중소기업청은 '전통시장 청년상인 창업지원' 사업을 시작했다. 청년몰 모델을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여 전국으로 확대하기로 한 것. 전주 신중앙시장을 비롯해 전국에서 20개 시장이 뽑혔고, 시장마다 2억5000만 원(각 점포엔 2500만 원)이 지원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제도로 자리 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혁신적 해법은 삐걱대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지난해 10월엔 "청년 창업지원 700억 썼는데…'텅텅'"(KBS)을 비롯해 청년몰의 사업 실패를 지적하는 기사들이 쏟아졌다. 기사엔 "청년들의 창업을 돕기 위해 시작한 청년몰 지원사업에 2016년부터 700억 원이 넘는 예산이 쓰였는데, 청년몰 태반이 문을 닫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꼬집었다. 몇 달 전 가본 전주 남부시장 청년몰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기사가 나가자 중소벤처기업부는 "2016년부터 43곳 조성해 현재 37곳 운영 중(633개 점포 중 68%인 429개 영업 중)"이라며 해명에 나섰다.

청년몰 모델이 한계를 드러낸 가운데 다행히 새로운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다(중소벤처기업부는 2022년을 끝으로 더는 청년몰을 새로 만들지 않기로 했다). '골목 식당 살리기'로 이름을 날린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는 고향인 충남 예산에서 재래시장 살리기에 나섰다. 알려진 것과 달리 2019년 무렵에 시작한 일이라고 하니 거의 4년을 매달린 셈이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새마을호(장항선)만 겨우 서는 인구 7만 명 도시 예산군에 올해 1월부터 8개월 동안 무려 140만 명을 불러들였다.

전북 전주에선 팔복동 도시재생 지역의 빈집을 전주시가 사들인 뒤 네 개의 개성 넘치는 가게들로 되살렸다. 이 프로젝트엔 백종원 대표의 뒤를 이어 공간 기획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유정수 글로우서울 대표가 1년을 매달렸다. 이곳 가게들은 평일에도 가게마다 줄을 서야 할 만큼 찾는 이들이 많다.

한때 ‘청년몰’로 모아지던 재래시장(또는 상권) 활성화 시도(모델)가 벽에 부딪힌 상황에서 곳곳에서 새로운 실험이 벌어지고 있는 건 반가운 일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청년몰과 어떻게 다를까. 몇 가지를 꼽아보자면, 먼저 넓은 지역을 바라보며 큰 밑그림을 그리고, 오랜 기획과 준비 기간을 거쳐 (지역적 특색을 살린) 개성 있는 공간을 구축한 뒤 F&B(콘텐츠)를 개발하고 경쟁력 있는 운영자를 뽑아 맡긴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 과정에서 여러 건축가, 공간 브랜딩 전문가, 콘텐츠 개발자들이 힘을 보탰다. 지속적인 교육과 관리, 활성화를 위한 기획(로컬 브랜딩) 등도 더해졌다. 지금까지 청년몰들에선 찾아보기 힘들었던 여러 요소들이 더해진 셈이다. 또 공중파(MBC)와 유튜버(샌드박스네트워크)를 비롯한 영향력 있는 미디어를 동원한 마케팅과 더본코리아, 글로우서울 등 민간기업의 투자와 이익 공유 방식을 도입한 점도 눈에 띈다.
 

▲ 기찻길 옆 골목책방 SNS 갈무리.
▲ 기찻길 옆 골목책방 SNS 갈무리.

그렇다면 로컬 크리에이터 생태계 조성을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역시 사람, 즉 혁신가(키 플레이어)다. 혁신적 해법을 발굴하고, 지역 안팎의 인적·물적 네트워크를 동원하는가 하면, 다양한 이해관계자 간 협력과 갈등을 관리할 수 있는 혁신가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하다.

지역 자원을 활용해 차별화된 콘텐츠를 개발하는 일도 필요하다. 모종린 교수는 "한국에서 로컬 만큼 다름의 소재를 풍부하게 공급할 수 있는 자원은 없다"(『머물고 싶은 동네가 뜬다』)고 했는데 맞는 말이다. 지역의 고유한 자원을 발굴하고 재해석해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려면 끈질긴 인내와 노력 그리고 전문성이 필요하다는 점도 놓쳐선 안 된다. 또 '지역 자원은 진부하고 낡았다'는 지역민의 인식도 뛰어넘어야 한다. 지역 자원을 활용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민과 관 그리고 지역의 다양한 역량과 이해관계자들을 모아 단단한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크고 작은 성공의 경험을 만들어내는 것도 필요하다. 당장 급하다고 지역 밖(서울)에서 핵심 역량을 끌어오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더디더라도 오래 가는 방법을 찾는 게 옳다. 또 행정은 기다려주지 않는 만큼 설득하기보다는 끊임없이 보여주면서 시간을 벌어야 한다.

지역의 역량을 끌어모으고 협조를 이끌어내려면 지역 사회의 핵심 네트워크 안에 스며들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지방 중소도시만 해도 출신 학교에 따른 집단의식이 무척 단단한데, 이 역시 그 사회의 무시할 수 없는 문화다. 지역 사회의 네트워크 안에 스며들어 관계를 맺으려면 이른바 ‘지역 친화적 정무감각’도 길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배척 당하거나 만만하게 보이기 십상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수도권 대도시에서만 살다가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전북 익산으로 이사온 지 이제 겨우 2년 하고 한 달이 지났다. 그 사이 정말 많은 일들을 겪었고, 이제야 지방에서 살아간다는 게 어떤 건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삶의 터전을 바꾸는 일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아주 멀리 내다보면서 조금씩 뿌리를 내릴 각오가 필요하다. 1-2년 사이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길 기대해서도 안 된다. 그리고 그게 무엇이든 나만의 무기 하나쯤은 있어야 뜻을 이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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