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과 빈민운동의 고민: 경제활동 직접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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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과 빈민운동의 고민: 경제활동 직접 할 것인가?
[퀘벡 사회적경제 이야기 ⑥] 80년대 초 경제위기를 맞은 노동과 시민운동의 변신
  • 2019.10.22 10:51
  • by 김진환 (사회적경제 국제교류센터 연구원)
11:02

'사회적경제 국제교류센터 CITIES'는 각 나라의 사회적경제간 지식 공유와 혁신의 확산을 위한 활동가들의 교류를 활성화 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조직으로, 2016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제 2회 국제사회적경제포럼 GSEF에서 참가자들의 결의로 출범했다.

사회적경제 모범사례와 관련 지식의 확산을 도모하는 '사회적경제 국제교류 센터 CITIES'와 '라이프인'이 캐나다 퀘벡주의 사회적경제의 전반을 소개한다. 공정무역 이야기를 시작으로, 사회적경제 생태계, 사회적금융, 사회적주택, 돌봄 사회적기업 등 다양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앞선 글에서 다룬 것처럼 퀘벡 사회적경제의 바탕이 된 것은 20세기 초 농업의 영세성으로 인한 협동의 필요성이나 금융서비스의 부재로 인한 고리대금 성행 등 당대의 사회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대안으로 성장한 협동조합 섹터이다. 농업협동조합 및 신용협동조합은 당면한 문제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책으로 인정받으면서 농업 섹터와 금융 섹터의 중심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1980년대부터 태동하여 1990년대 중반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한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경제 조직들 또한 당시 경제 전반의 위기감을 불러온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효과적인 해결책으로 인정을 받았기에, 비주류가 아닌 경제 문제 해결의 중요한 기둥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번 기사에서는 1980년대 퀘벡 경제의 상황과 사회적경제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두 가지의 중요한 논쟁을 소개한다. 그렇다면 먼저 1980년대에서 1990년대로 이어지는 당시의 중요한 논쟁은 무엇이었을까?

첫 번째 논쟁은, ‘노동조합이 경제발전을 위한 투자에 직접 참여해야 하는가’하는 논쟁이었다.

2차대전 이후 퀘벡의 경제는 기존의 농업, 임업, 광공업 등 저임금, 저부가가치 1차 산업 위주의 경제에서 제약, 항공산업, 금융 등 고부가가치 첨단산업으로 점진적인 변화를 거쳐왔다. 1981년과 1982년 연이어 경제위기를 겪은 퀘벡은 80년대에 산업구조 조정으로 인한 실업이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당시 경제위기는 ‘대공황 이후 최악’이라고 할 정도로 심각했다.  당시 기업 대출 이자율은 25%까지 치솟았고, 실업률은 14%(Arsenault 2016)에 달했다. 1982년 당시 집권 퀘벡당 (Parti Québécois)은 노사정 대표자 회의를 소집하여 경제위기, 특히 경제위기로 인한 고용위기 문제 대응방안을 논의하였다. 

당시 퀘벡 주 최대 노동조합이던 퀘벡노동자 총연맹의 논의되어 실행되었던 안 중 하나가 재정을 투입하여 주택 건설 기금을 설립하여 저가의 주택을 보급하는 안이었는데, 퀘벡 노동자 총연맹 (퀘벡 노련; Fédération des travailleurs et travailleuses du Québec: FTQ)의 의장이었던 루이 라베르쥬(Louis Laberge)는 이 자리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저소득 노동자들을 위한 코르베 주택 기금(Corvée Habitation Fund)을 제안했다. 더불어 노동자들의 퇴직연금 기금을 만들어 퀘벡의 고용을 창출하는 기업들에 투자하도록 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코르베 주택기금 안은 1982년 노사정 대표자 회의의 결정사항으로 채택되어 실행이 결정되었으나, 퀘벡 고용 창출을 위한 노동자들의 퇴직연기금 설립안은 채택되지 못했기 때문에, 제안을 실행하고 싶다면 퀘벡노련 단독으로 결단을 내려야만 하게 되었다. 퀘벡노련은 내부적으로 깊은 고민에 빠졌고, 치열한 토론에 돌입했다.

당초에 일자리 창출과 유지를 위해 노동자가 투자하는 기금을 만든다는 아이디어를 퀘벡 노련이 검토한 것은 그것이 경제민주화의 가장 중요한 토대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계획 경제가 아닌 시장경제를 전제로 경제민주화를 진전시키는 방법은 기업의 자본투자에 참여하고, 이익배분의 권리를 가지며, 경영의사 결정에 참여함으로써 기업활동의 전반이 소수 주주의 이익이 아니라 소속 노동자, 회사 밖의 실업자, 미래 세대, 그리고 사회 전반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도록 통제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을 현실화하는 데에는 많은 갈등이 따랐다. 노동조합 차원에서 노동자들이 기업에 투자하는 기금을 만든다는 아이디어는, 노동운동의 순수한 이념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고, 반대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사회주의적인 방식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보다 현실적으로는 노동자들이 투자한 연기금에서 손실이 나는 경우를 우려하는 시각도 있었고, 따라서 연금펀드는 국가가 운영하는 것이 낫다는 반대도 있었다. 특히 노련 차원에서 적극 개입했던 부도위기 기업 트리코필의 노동자 인수 실험이 실패로 돌아간 경험은, 노동자들이 기업의 지분을 직접 인수하는 방안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게 했다.

1964년부터 1991년까지 퀘벡 노련을 이끈 루이 라베르쥬 위원장 ©FTQ - Fédération des travailleurs et travailleuses du Québec

퀘벡 노련은 나라 안팎의 여러 사례들에 대한 연구 조사와 치열한 내부 토론을 통해 총회에 부의할, 보다 설득력 있고 현실적인 안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검토되었던 사례들이 스웨덴의 노동자 기금과 미국식 우리사주 제도 등이었다. 노사정 대표회의에서 연대기금안을 제안한 당시 퀘벡 노련의 루이 라베르쥬 위원장은 이미 1979년 스웨덴의 노동자 기금을 방문하여 기금의 구조와 운영방식을 학습한 바 있었고, 유사한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미국식 우리사주제도 (Employee Stock Ownership Plan: ESOP)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노동자 개인으로서 투자에 참여하게 하여 자본에 대한 통제 기능을 할 수 없는 미국 방식의 우리사주제도는 경제민주화에 기여하는 바가 없다고 판단했다. 장기적으로 기존 자본 투자자들의 지분을 중앙 집권적인 국영 노동자 기금으로 대체하는 목표를 가진 스웨덴 노동자 기금은 광범위한 동의를 얻기 어렵다고 보았다.

1983년의 퀘벡 노련 총회에 부쳐진 안의 핵심은, 스웨덴 기금처럼 의무적으로 공제되는 기금으로 조성되는 국영 펀드가 아닌, 노조 가입자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민간 연기금 펀드를 설립하되, 퀘벡의 고용 창출 및 유지라는 공익적 목적과 연기금 가입자의 수익 보장이라는 두 가지 목표의 균형을 추구하는 기금으로 설립하는 것이었다. 1983년 4월, 퀘벡노련의 대의원 총회는 격론 끝에 근소한 차이로 퀘벡의 고용 창출 및 유지를 위해 기업에 투자하는 퇴직연기금을 설립하는 안을 승인했다. 

당시 사민주의 계열의 퀘벡당 정부는 초기 설립 준비 관련 비용을 지원하고, 피고용인의 과반수가 퀘벡에 있는 회사에 투자할 것을 조건으로 기금가입자의 연기금 불입액에 파격적인 세액공제를 제공하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특별법을 제정하여 퀘벡 노동자 총연맹의 노동자 기금인 퐁 드 솔리다리떼 (Fonds de solidarité)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세액 공제분은 주정부 세금에 15%, 연방정부 세금에 15%의 세액공제가 적용되어, 연기금 투자자에게 매력적인 상품이 될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로, 노총의 산하 조합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인기가 높은 연기금이 되었다. 퐁 드 솔리다리떼는 퀘벡 내의 다수 중소기업들에게도 높은 호응을 받게 되었는데, 대형 투자은행 등의 투자가 대기업에 집중되는 데 반해, 퐁 드 솔리다리떼의 기금은 퀘벡의 고용을 유지, 창출한다는 설립취지와 특별법 조항에 의해 피고용인이 과반수 이상 퀘벡 내에 있는 기업에 투자해야 한다는 제약조건으로 중소기업에 많은 투자를 했기 때문이었다.
 

퐁드 솔리다리떼의 설립을 논의하는 총회 사진 ©Fédération des travailleurs et travailleuses du du Québec

퐁 드 솔리다리떼는 오늘날 퀘벡 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경제발전 기금으로, 2019년 현재 순 자산이 150억 6천 캐나다 달러(약 13조 5천억 원)에 달하며, 기금 가입자의 수는 약 70만명에 달한다. 창업가에 인내 자본을 제공하여 혁신적인 기업을 육성하며, 지방자치 정부와 파트너십을 통해 지역 내 중소기업에 투자하는 74개의 지역 연대 기금, 3백만불 이상의 광역단위 경제 발전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16개의 광역 펀드 운영사무소, 84개 산업분야별 육성 프로젝트에 투자하는 섹터별 기금이 있다. 현재까지 퐁 드 솔리다리떼의 투자를 받은 회사의 수만도 3,126개에 달한다.

퐁 드 솔리다리떼는 노사정 합의의 산물로 정부, 노조, 사용자 측에 각각 이점이 있었다. 정부 입장에서는 경제활성화와 고용창출이라는 정책 목표에 투자할 수 있는 민간 기금이 새로 생겨나면서 정책 목표의 달성에 도움이 되었고, 노조 입장에서는 회원 조합원들의 실직 사태를 방지하고 회원들의 노후자금 조성에 기여하면서 간접적으로 투자 대상이 되는 기업들이 노조에 대해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면서 간접적으로 노조의 협상력을 높이는 데에도 기여했다. 사용자 중 특히 중소기업들은, 다른 투자 기금과 달리 중소기업에 대한 투자 비중이 높은 퐁 드 솔리다리뗴를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두 번째 논쟁은, 과연 지역운동을 하는 비영리 단체들이 직접 경제활동에 나서야 하는가? 하는 논쟁이었다.

경제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1986년의 노사정 대표회의에서 특히 몬트리올의 동부, 남서부, 그리고 중남부가 고용위기 지역으로 지정되었다. 특히 남서부 지역에서는 1967년부터 1988년 사이의 일자리 유실이 2만개를 초과했으며, 한때 실업률이 25%에 달했다. 이 지역에서는 정부 보조금을 투입하여 지역 내 일자리를 창출하는 기업을 유치하고자 노력을 지속했다. 그러나 보조금 집행기간이 끝나면 기업이 철수하는 등의 문제를 겪으면서 지역 빈민운동을 하던 활동가들은 직접 경제활동을 조직하는 것 외에 고용위기에 대응하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1984년, 낸시 님탄을 비롯한 활동가들은 뽀앵뜨 생-샤를(Pointe-Saint-Charles) 경제발전 프로그램 조직을 수립하여 운영했다. 기존의 비영리단체들이 자선활동이나 배분사업에 집중했던 것과는 달리, 이 그룹은 해당지역의 경제 발전과 고용 창출을 위해 필요한 일들을 기획하고 자원을 연결하는 허브 역할을 떠맡았다. 실업자의 재취업 기회를 알선하며, 해당 지역 실업자들의 특성에 맞는 직업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각 지역의 실업 인구의 특성에 맞는 프로그램을 기획하며 지방자치단체, 기업, 노조 및 지역 공동체 비영리단체들 간의 협의 테이블을 만들어 지역의 빈곤문제 개선 및 경제발전을 위한 프로그램의 중심 역할을 수행했다. 이런 프로그램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정부 공공기관, 기업 및 비영리 재단들을 설득하여 필요한 지원을 이끌어냈다. 

초기에는 이와 같이 비영리 단체가 경제활동을 직접 조직하고 기획하는 일을 주도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 있었다. 이해당사자 간 협의 테이블에 참여하도록 권유를 받은 각 지역의 노동운동, 지방자치단체 또한 처음에는 이 모델에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역운동을 하면서 지역 사람들의 사정을 가장 잘 이해하는 지역운동단체들에게 주도권을 맡겼을 때 실질적으로 문제에 도움이 되는 해결책이 나온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한 이해 당사자들은 점차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빨간 색으로 표시된 지역이 몬트리올 남서구이다. ©Eshiko Timiou

1986년 노사정 대표자 회의에서는 해당 프로그램의 효과성이 인정을 받아 최초의 지역공동체 경제발전공사 (Corporations de Développement Économique Communautaire: CDEC)라 할 수 있는 남서부 경제 사회 재건위원회 (Regroupement Économique et Social du Sud-Ouest: RÉSO)가 법인으로서 출범하게 된다. 지역운동의 주축이었던 시민사회 활동가들이 이와 같이 지역 내 주요 이해당사자들 간의 대화 테이블을 조직하여 각 이해당사자 그룹의 실질적인 이해를 반영하는 경제발전의 기획을 이끌어내는 모델은 86년 이후 각 지역의 지역공동체 발전공사로 확산되었을 뿐 아니라, 1996년 이후 사회적경제 관련 주요 이해당사자들의 대화 테이블을 통한 이른바 ‘공동기획 (Co-Construciton)’ 방식과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다음 기사에 1996년의 노사정 시민사회 4자 대표자회의를 본격적으로 다루게 되는데, RÉSO를 이끌던 낸시 님탄은 1996년 노사정+시민사회 4자 대표자회의에 초대되어, 사회적경제 샹티에, 즉 사회적경제의 건설현장이라는 뜻을 갖는 워킹그룹의 좌장이 되어 노사정 시민사회 4자 대표자회의에 제출할 기획안을 만드는 중심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 RÉSO 활동과 관련된 신문기사 ©Canadian CED 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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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환 (사회적경제 국제교류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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