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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작은 도시 '나가'에는 한국 분식집이 있다

기사승인 2019.12.13  09:5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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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변화를 꿈꾸며

2015년 유엔이 발표한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는 사회개발에 한정되던 새천년개발목표(MDGs)의 관점에서 벗어나 경제적·사회적·환경적 가치를 함께 추구하며, 17개라는 방대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전지구적 파트너십을 바탕으로 공동협력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유엔은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사회적경제 조직을 중요한 SDGs 이행 수단으로 보고 있다. 최근 코이카와 열매나눔재단에 진행한 '사회적 가치 생태계 육성 프로그램'에서도 송진호 코이카 사회적가치경영본부 이사는 "개발협력과 사회적경제는 모양은 다르지만 비슷한 목적지를 향해 가는 두 바퀴와 같다."라고 설명했다. 개발협력분야에서 사회적경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만큼 현장에서는 다양한 시도들이 진행되고 있다. 필리핀 취약계층 여성들의 지속가능한 일자리를 노동자협동조합 형태로 만들고 있는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 글로벌사회적경제학과의 '카이나(KAINA)'프로젝트를 소개한다. [편집자 주]

필리핀 나가(Naga City, 이하 나가)에는 한양대학교 학생들이 작년(2018년) 6월부터 영업을 시작한 한국식당 '카이나(KAINA)'가 있다. 한류 열풍이 한창인 필리핀에서 한식 보급을 수단으로 취약계층 여성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자는 것이 카이나 프로젝트의 취지이다. 

사실 한식당이라기보다는 분식집에 가까운 이 식당에서는 외국인들이 한국 매체를 통해 흔히 볼 수 있는 김밥, 라면 등 캐주얼한 한식을 판매하고 있다. 한류의 파급력은 가장 크지만 현지음식보다 비교적 높은 가격대의 정통한식을 소비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학생들을 주 타깃으로 공략했기 때문이다. 현재 카이나는 나가 소재 아테네오대학교에 1호점을, 그리고 초‧중‧고등학생들이 다니는 일반 사립학교인 세인트조셉스쿨에 2호점을 운영 중이다.

사업을 해본 경험이 없는 한국의 대학생들과 한국 땅을 밟아본 적이 없는 필리핀의 취약계층 여성들이 만나 한식당을 운영한다. 아이러니하게 들릴 수도 있는 조합이다. 대학생들은 우연히 인연이 닿은 필리핀의 작은 도시를 거점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고, 취약계층 여성들은 일자리가 필요했다. 우리는 카이나에서 일하는 취약계층 여성들을 나나이(Nanay, 어머니)라고 부른다. 전 세계의 모든 어머니들이 그렇듯 “밥은 먹었어?”가 나나이들에게는 가장 당연하고 중요한 인사다. ‘카이나’라는 단어의 의미 역시 필리핀 언어인 따갈로그어로 ‘같이 밥 먹자’라는 뜻이다. 가족들을 위해 요리하는 것이 일상인 그들에게 김밥을 말거나 라면을 끓이는 것은 썩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사람들이 만났다. 사소한 시작이었다.

▲카이나 1호점 Nanay(어머니)들과 한양대학교 파견학생들. 필자는 왼쪽 두 번째. ⓒ카이나

혁신의 시작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시도이다

'혁신'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어감이 가볍지 않다. 사회혁신을 위해서는 무언가 거창한 계기로 대단한 일을 해야 할 것만 같다. 게다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아닌 세계 곳곳의 문제들에 대응하고자 고군분투 하는 이들은 더욱 주목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썩 특별할 것이 없다. 혁신의 사전적 의미는 '묵은 풍속, 관습, 조직, 방법 따위를 바꾸어 새롭게 함'이다. 사실은 그저 기존의 방식을 탈피하여 보다 나은 삶을 모색하는 크고 작은 모든 시도가 모여 세상을 바꾸고 있다.

과거 국제개발협력의 수단으로 가장 보편적이었던 구호 또는 일방적인 기여는 눈앞의 문제를 덮을 수는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카이나에서 일하는 취약계층 여성들은 모두 강제 이주민들이다. 나가의 도심 개발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큰 쇼핑몰이 들어왔고, 본래 그곳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공동묘지 인근의 변두리로 쫓겨났다. 주거구호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NGO에서 철거민들을 위해 저렴한 가격에 주택을 공급해주었고, 그 덕분에 주민들은 허름하지만 평화로운 안식처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주민 대부분은 여전히 직업이 없거나 비정기적인 단순 노동에 종사하며 생계를 잇고 있다.

▲한국의 60-70년대 풍경과 유사한 강제 이주민 주거지역 ⓒ카이나

그중에서도 특히 카이나는 여성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 이들은 모두 혼자서 아이를 키우거나 남편이 있지만 안정적인 수입이 없어 불안정한 삶을 살아왔다. 필리핀에서 혼인신고를 하려면 복잡한 행정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가정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부부관계에 대한 법적 구속력이 없기 때문에 남편이 쉽게 떠나버리는 일도 적지 않게 발생한다. 결국 남겨진 여성은 홀로 아이를 키우며 생활고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잠깐의 물질적인 도움이 아니라 지속적인 수입을 보장할 수 있는 일터이다.

카이나는 함께 일하는 이들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생각한다

카이나에서는 취약계층 여성들에게 간단한 한식 조리 방법을 비롯하여 식당 운영에 필요한 회계와 행정업무 등을 교육하고 있다. 카이나의 핵심 목표는 그들의 경제적 자립이다. 카이나 프로젝트의 초기 단계에서는 매장 오픈을 위한 비용을 모두 한양대학교에서 지원했다. 그렇지만 향후 노동자협동조합 형태의 법인으로 전환하여 일정 기간 트레이닝 이후 각 매장의 사업권을 조합으로 온전히 이전하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매장을 확장하여 사회적 임팩트를 확산하려는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다. 진정한 의미의 자립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들 스스로 한국인이 고용한 직원이 아닌 카이나 운영의 주체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카이나는 이곳에서 일하는 어머니들의 삶의 대안이 되었다. 그리고 카이나에서 일을 시작한 이상 카이나를 함께 운영하고 있는 한국의 대학생들 또한 그들 삶의 일부가 되었다. 그래서 카이나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적어도 카이나와 함께 삶의 희망을 찾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무책임한 사람이 되면 안 된다"라고 배운다. 

카이나처럼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청년들의 창업이 예전만큼 어렵지 않다. 최근 몇 년 사이 청년들을 필요로 하는 현장이 많아졌고 정부의 지원도 다양하다. 진입장벽이 낮아진 만큼 그저 한번쯤은 경험해봐야 할 가치 있는 일, 취업을 위한 이력, 심지어는 도피의 수단으로까지 개발협력 분야의 문을 두드리는 청년들을 보면 가슴이 먹먹해 진다. 그리고 그동안 장기계획과 출구전략 없이 끝까지 책임지지 못할 일을 벌여놓기만 하고 쉽게 뒤돌아서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시작은 성과가 아니다. 시작은 시작일 뿐이라는 것을 카이나팀은 언제나 기억하고 있다.

▲카이나 2호점에서 트레이닝 중인 Nanay(어머니)들. ⓒ카이나

 

공정희
몽골 파견을 시작으로 2013년부터 쭉 국제개발협력 현장에서 일했다. 주로 봉사자들과 현장 사이의 다리가 되어 가치를 확산시키는 역할을 해왔으며, 그 과정에서 느낀 변화와 성장에 감동하여 사람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게 되었다. 현재 필리핀 '카이나'프로젝트에서 한양대학교 파견학생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공정희 (한양대학교 글로벌사회적경제학과 석사과정) webmaster@lifein.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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